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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의 앞머리를 낚아채라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9-12-27 12:43
조회
75


제1270호 표지이야기 ‘2019.6.30 판문점’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

2018년 드디어 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왔다는 기쁨이 넘쳤다. 그래서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빅딜’이냐 ‘스몰딜’이냐는 예상이 무성했다. 다들 크든 작든 어쨌든 회담 성과가 있을 것으로 봤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결렬됐다. 빅딜도 스몰딜도 아닌 ‘노딜’(성과 없이 결렬)이었다. 4월12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연말까지 북-미 협상 시한을 정하고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오라고 요구했다.

지난 10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미 실무협상은 결렬됐다. 세밑 북한과 미국은 대화는커녕 말싸움을 점점 거칠게 벌이고 있다. 연말 협상 시한을 넘길 경우 북한은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공언했다. ‘새로운 길’의 내용은 비핵화 협상 중단 선언과 핵보유국 재확인, 대북제재에 맞서 자력갱생 경제 강화, 중국·러시아와 국제협력 강화 등이 꼽힌다.

문제는 북한이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등 이른바 레드라인(금지선)을 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다. 2020년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가만있기 어려울 것이다. 이 경우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돌던 2017년처럼 ‘화염과 분노-괌 포위사격’ 같은 극한 대결로 돌아갈 수도 있다.

독자적인 남북관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북-미 비핵화 협상 결과에 남북관계를 연동해온 한국 정부의 전략을 바꿔야 한다. 한국 정부는 북-미 관계가 잘 풀리면 북미-한미-남북 삼각관계의 선순환을 기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6월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때 자리만 만들어주고 전면에 나서지 않는 ‘멍석 외교’를 펼친 것도 이 때문이다.

내년에 북-미 관계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질 경우 한국 정부는 독자적인 남북관계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고 발전시킬 것인지 등 ‘새로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정한 연말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카이로스(Kairos)란 그리스·로마 시대의 시간 개념이 떠오른다. 당시 사람들은 카이로스 이미지를 앞머리는 무성한데 뒤는 대머리고, 손에 칼을 들고 발목에 날개를 단 모습으로 묘사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 확 잡아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고, 뒤가 대머리인 이유는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바람과 함께 최대한 빨리 사라지고, 칼을 든 이유는 칼같이 결단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미국은 데드라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북한의 연말 협상 시한을 반박했다. 시간은 북한 편도 미국 편도 아니다. 양쪽은 지금 시간의 긴 앞머리를 낚아채지 않으면 ‘놓친 기회’의 대머리 뒤통수를 뒤늦게 바라봐야 한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 넘을 수 없는 벽”(도종환 시인의 ‘담쟁이’ 중) 올해 남북관계, 북-미 관계 등 출렁거린 한반도 상황을 돌이켜볼 때 드는 솔직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는 이탈리아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에서 희망을 찾아보려고 한다.

2019-12-24 한겨레21 원문보기